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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여행/츄고쿠(中國)

[2018야마구치(4)] 요시다 쇼인의 혼이 살아숨쉬는 쇼인신사, 쇼카손주쿠




잠깐 시간이 남아서 나가토로  가기전에 들른곳은 바로 요시다쇼인을 신으로 모신

쇼인신사였다.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인 기도 다카요시, 다카스키 신사쿠, 이토히로부미 등을

길러낸 근대 일본 정치문화계의 정신적인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요시다 쇼인을 

모신 신사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반가운

인물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일본의 상징적인 인물을 기리는 신사라는 점에 그 의미가

있다.




하기 시내를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소박하지만 정갈한 하기의 모습



레트로한 모습의 커피숍 간판



유골을 모신 신사



쇼인신사는 히가시 하기역에서 조금 걸어가면 있다.



정갈한 모습의 하기시내



하기시내 전체를 흐르는 강을 따라가면 히가시하기역이 있다.



히가시하기역 앞에있는 밥집에서 야키소바도 한그릇 먹었다.



쇼인신사로 향하는 길



날씨가 맑아서 정말 기분이 좋았다.



매화가 많이 피어있었다.



아기자기한 모습의 쇼인신사



쇼인은 분세이 13년 음력 8월 4일 조슈 번사 스기 유리노스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5살 때 야마가류 병학사범인 숙부의 양자가 되었다. 

숙부 다마키 분노신(후의 쇼인의 양부)에 의해 병법을 배우고 1850년 병학연구를 위하여 규슈에 유학하였다. 

이듬해 에도에 가서 사상가 사쿠마 쇼잔에게 서양 학문을 배우고, 

매슈 C. 페리 흑선 외교를 계기로 도쿠가와 막부에 대해 분노를 느끼며 존왕양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외국 유학을 결심, 1854년 제자인 가네코 시게노스케(金子重之助)와 해외 밀항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투옥되었다. 

숙부 분노신이 설립한 쇼카손주쿠를 인수하여 1857년 자택에서 쇼카손주쿠의 숙장으로 취임하였다.

학숙의 숙장이면서도 쇼인은 교수 중의 한 사람으로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신사의 모습



신사에 있는 혼텐



천하는 천황이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는 즉 천황 아래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일군만민론'(一君萬民論)을 주창하였다. 또한 그는 한국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기도 했다. 정한론은 그의 제자인 이토 히로부미 등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일반적인 신사의 모습과 큰 다른모습은 없지만 그래도 쇼인신사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는곳이어서 좋았다.



아름답게 피어있는 청매화



청매화와 흑매화의 조합이 아름다웠다.



유신삼걸 중 하나인 기도 다카요시(이때 가쓰라 고고로),

 과격파 유신지사의 대표격이자 기병대의 수장인 다카스기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 

그와 함께 권세를 누린 이노우에 가오루 등 유신의 주요인사들이 쇼인의 죽음으로 분기했다.


한편 존왕양이를 주창한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이 훗날 커다란 정치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요시다 쇼인을 버렸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2006년 9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그를 가장 존경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일본의 우익단체 중에는 그의 이름과 그가 활약하던 학당인 

'쇼(松)'라는 글자를 따서 그의 정신을 기리는 쇼콘주쿠(松魂塾)라는 학당이 있어

 그의 학맥이 계승될 만큼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쇼카손주쿠 내에 쇼인을 모신 신사(神社)가 세워져 성역화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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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 쇼인신사는 쇼가손주쿠 내에 위치하고 있다.



쇼카손주쿠란 ?


기와지붕의 단층 목조건물로 50.90㎡의 작은 교육시설이다. 

에도시대 후기 조슈번[長州藩]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강의한 사숙으로 유명하다. 

요시다 쇼인은 일본의 무사이자 사상가, 교육자이다. 일반적으로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이론가로 잘 알려져 있다. 

쇼카손주쿠는 하기성[萩城]의 쇼카촌[松下村, 현재의 하기시]에 

요시다 쇼인의 숙부인 다마키 분노신[玉木文之進]이 1842년 자택에 사숙을 연 것이 시작이다.

 이어서 구보고로자에몬[久保五郎左衛門]이 계승하여 교육에 임했다. 

1857년 28세의 요시다 쇼인이 이어서 제자를 교육하게 되었다. 

쇼인은 신분과 계급에 상관없이 제자를 받아들여 불과 3년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메이지유신으로 신정부에 관련한 인물을 다수 배출하였다. 메이지유신 이후에 부활하여 1892년까지 존속했다. 

하기시의 쇼인신사[松陰神社]의 경내에는 부활된 당시의 건물이 있다.

 1922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쇼인신사가 관리하고 있다. 




쇼인신사를 나와서 히가시 하기역으로 향했다.



하기야키의 문양이 살아있는 히가시하기역의 모습



다음 목적지인 모토노스미 이나리신사가 있는 나가토 후루이치로 향하며

쇼인신사 여행을 마무리 지었다.